국가정보원의 혁신 및 정보의 헌법
한국 국정원 개혁을 위한 10가지 원칙
정보기관 개혁이 정쟁거리나 선정적인 기사거리가 아니라 국가안보 주제로 부상할 수 있다. 우리는 정보기관이 믿을 만하고 정확한 정보를 입법자들과 시민에게 제공하도록 만들 방안을 대승적으로 살펴야 한다. ‘가짜 뉴스’ 같은 왜곡된 정보가 판치는 인터넷 정글의 시대에 정책 안정성을 확보하고 선정주의적 매체에 대한 관리들의 의존도를 줄이려면 더더욱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 출처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개혁을 위한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최고 인재들이 당장의 정치적인 이득보다는 실제 도전에 맞서야 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막대한 자금을 정보 분야에 쏟아부어 획기적 발전을 거두는가 싶더니 이내 질적인 저하가 발생했다. 정보분석의 핵심인 ‘인간’이 등한시됐다. 정치권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수십억 달러 프로젝트에 포함된 컴퓨터와 인공위성이었다. 컴퓨터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한국은 컴퓨터가 우리를 미혹하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
둘째, 경제적·기술적 변화가 우리나라를 어떻게 변용시키는지를 역사성 있는 통찰력으로 파악하는 분석가들이 필요하다. 데이터 분석으로 세계 추세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그들은 탄탄한 인문학·문학·역사·철학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쓸모 있는 정보는 의미 있는 정보다. 숨 가쁜 기술 발전이 사회의 본질을 바꾸고 있다. 정적(靜的) 모델을 탈피하고 미래학 관점을 더 많이 도입해야 한다.
셋째, 외국 정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국의 풍성한 역사 경험을 이용해야 한다. 조선의 춘추관(春秋館)은 500여 년 동안 방대한 사회 데이터를 흠잡을 데 없는 객관성으로 분석하고 최상급 역사 기록을 남겼다.
넷째, 다른 나라들의 통치·정치·경제 체제가 계속 같은 방식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상정하면 안 된다. 정책결정 과정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된다. 우리 정보 모델은 변화를 선제적으로 예상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다섯째, 기밀 입수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선견지명 있는 데이터 해석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일들을 지속적으로 예측하는 게 핵심 정보활동이다. 갈수록 그렇다.
여섯째, 정보기구 내에서 젊은이·여성과 다문화 한국인의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 젊은 요원들로 구성된 복수의 개별 팀들을 창설해야 한다. 팀들이 정확성을 목표로, 신선한 시각을 수단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게 필수적이다. 혁신 모델 수립을 장려하려면 어쩔 수 없는 실수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
일곱째, 어떤 나라나 지방의 정치·지리·역사를 상세히 아는 인력이 필요하다. 중국·미국 전문가로는 불충분하다. 광시(廣西)나 일리노이 전문가도 필요하다.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 정보 모델도 필요하다. 경제·정치는 본질적으로 초국가다. 이미 나라·지역을 넘어선 유유상종(類類相從) 연대가 결성되고 있다. 글로벌 한국은 중앙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전문성도 필요하다.
한국 최대의 약점은 지역 전문가 양성에 실패한 것이다. 정치 바람을 타고 성공하는 ‘일반전문가(generalist)’가 너무 많다. 장기적으로 특화된 전문성을 발전시키는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 그들은 정치 인맥이 아니라 오로지 업무 효과성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여덟째, 북한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 정보활동을 탈피하자. 초국가화되고 있는 북한의 위협은 상식을 거스르며 보다 확장된 네트워크의 일부분으로 진화하고 있다.
아홉째, 위계서열적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 분석가들은 외국을 분석할 때 최고지도자나 장관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하지만 오늘의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갈수록 정책이 준장(准將)과 차관, 정치 컨설팅 회사, 임시 특별 그룹 같은 하위 수준에서 결정된다. 국정원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융통성 있게 모델을 수정해야 한다. 타국 정부들이 자국에 대해 유포하는 ‘신화’를 믿는 것은 근본적인 잘못이다. 어떤 정부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방대한 데이터 수집이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해 가능한 시나리오 6~7개를 내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 데이터로 최상의 모델에 도달할 때까지 개연성 없는 것들을 제거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정보는 극도로 심각한 분야이지만 예술의 측면도 있다. 고정관념을 탈피한 모델을 만들려면 창의 친화적 휴식 공간이 필요하다. 글쓰기나 연극 공연 같은 즐거운 활동이 창의력을 넘쳐 흐르게 한다.
나는 6년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산 부족에도 기죽지 않고 한국 고유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KRIBB는 특정 바이오기술 분야의 글로벌 리더는 아니지만 모든 의학 연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있다. 몇 분 내로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상의할 수 있다. 이런 이례적인 환경은 실리콘밸리나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도 없다. KRIBB 모델로 우리나라 정보 분야를 향상시킬 수 있다.
출처: 중앙일보 “한국 국정원 개혁을 위한 10가지 원칙”
‘정보 혁명’의 위기 와 정보의 헌법 하자
현재 한국에서는 지난 대선 기간 중 국정원의 댓글 조작에 의한 날조된 정보의 확산에 관한 격렬한 토론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일지 내가 판단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정보 조작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기관과 개인은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 것인지 확인하기 매우 어렵다.
미국도 국가 차원에서 NSA(국가안전보장국)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초래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한 미국 정부의 이러한 타국에 대한 승인되지 않은 정보 취득은 국가 간 중대한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정보 위조와 승인되지 않은 정보 수집을 단지 도덕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오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정보를 수집하고 위조하는 능력은 기술 발전에 따라서 소위 ‘무어의 법칙’ 속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 위조는 이제 너무나 쉬워서 유혹이 된다. 따라서 정보의 승인되지 않은 수집과 위조는 그 행위자에 대한 처벌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이러한 정보 오용을 근본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만이 궁극적 해결책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매우 강력하고 탄탄한 정보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정보 관리 기관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보의 정확성을 그들의 본질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정보혁명의 위기는 국경이 없는 국제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임을 인지해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민주적이며, 문화적 활력과 과학기술을 지닌 대한민국은 정확한 정보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적 기준을 만들어 낼 충분한 능력 및 자격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정보의 헌법’에 따른 정보 관리 협력 기구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이 제시할 국제적 ‘정보의 헌법’ 청사진의 실마리를 스티브 잡스에게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이 이 시대에 필요한 정보 통제를 위한 의미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오백 년 동안 이어져온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춘추관(春秋館)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실록’ 프로젝트는 정치가들로부터 독립하여 정확한 정보의 기록을 가능하게 한, 정부기관에 의한 아주 주목할 만한 시도 중 하나였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사초(史草)를 집필한 사관들의 정보 수집 관리와 사실 확인 방법들을 오늘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국제적 ‘정보의 헌법’ 제정을 위한 영감으로 기여하려면 그 적용 방법에서 근본적인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의 시스템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를 편집하는 ‘사관(史官)’들은 발생한 일에 관해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약속하는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독립성에 기반한 사관(史官)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정치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의식하고 행동해야만 했던 것이다. 단지 다음 날 자신들에 대한 신문의 헤드라인이나 다음 선거에 대한 의식보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다음 세대의 평가, 즉 역사적인 평가를 말한다.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엄중하게 독립성이 보호되며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춘추관 같은 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이런 제도의 객관성 유지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정보혁명 추세를 보면 꼭 필요하다.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은 왕을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도 당대에 관한 기술을 볼 수 없었다. 이런 규칙을 현재에 적용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그래도 정보를 정확하게 유지하려면 다 공개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된다. 정확한 정보가 객관적 자료에 따라 유지되는 것을 확약(確約)해 줄, 즉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쉽게 조종될 수 없는 시스템은 필요하다. 또한 현대에는 이러한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정확한 정보를 언제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양이 거대한 정보가 감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양이 거대한 정보는 이미 많은 개인과 사기업에 의해 감찰되고 있으며, 앞으로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에 대한 감찰은 물론 위조 또한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보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 시대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우리는 오직 조화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관을 재창조할 수밖에 없다.
출처: 조선일보 “한국 국정원 개혁을 위한 10가지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