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당
“운동주의,”불평주의, “불평등주의,” “마법사주의”
한국 정치를 망치는 악귀들
2021년 3월 19일
미국의 경제적, 제도적, 문화적 붕괴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신문과 TV 방송은 삼류 소설과 유치한 동화 같은 정보만 알려 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황폐화 되어 가는것과 소수의 권력자를 섬기는 노예 국가로 변해 가는 것을 어떻해서라도 막을 힘이 아무에게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만약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 문화의 극심한 병폐를 알고 있다면, 왜 우리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채 마비 상태로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왜 사소한 것을 토론하는 것 외에 그렇게도 많은 교육을 받은 수많은 국민들이 무기력하게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집중하고 이웃과 함께 더 나은 무언가를 창출해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서양으로부터 수입한 삼류 민주주의와 이기주의에 감염되어서 일까요?
이렇게 마비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광고 회사들이 만들어낸 달콤한 소비 문화에 흠뻑 젖어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를 이미지와 느낌에 지배 당하는 수동적 소비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패는 너무나도 만연하게 퍼져서 우리가 존경할 만 하다는 지도자들 조차도 끔찍하고 기괴한 축제의 일부 단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부검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괴질로 변한 20년 된 끔찍한 상처에 시달려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감염된 신체 부분을 용감하게 잘라내고 썩어 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대신 겨우 밴드 하나로 그 상처를 가리고, 그 독소가 소리 없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 결국 몸 전체 구석구석까지 변질되도록 놔두었을 뿐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들…모두 이 우스꽝스러운 희극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현주소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직장이 있다면 커피숍에서 당신이 최근에 다녀온 휴가 또는 지난주에 당신이 먹었던 멋진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것 없이 뭐가 되었든 직장을 갖고 열심히 일 해서 돈 벌려고 노력하지만 긴 하루 뒤에 아무런 대가 없이 터벅터벅 거주지로 돌아옵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할 힘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고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도 절망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제재가 곧 끝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의 서글픈 상태에 기여해 온 미국의 세가지 동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 3가지의 사태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도 힘도 없다고 느끼며 결국 이러한 혼란한 시국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마구 던져지고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 현 상황에 대한 말도 안되는 거짓말에 언론으로부터 세뇌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쇼핑몰에서, 우리 집 거실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표면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권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동향은 바로운동주의, 불평주의, 마법사주의입니다. 이 용어들은 생소하면서도 어쩌면 조금은 귀에 거슬릴 것입니다. 이 용어들은 낯설고 거슬리는 것이 당연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깨우고 싶고, 그들을 이 흐름의 잠에서 흔들어 깨워서 그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문제는 운동주의입니다.
운동주의란 어떤 관점이나 정책을 위한 청원서 서명 및 지지 규합을 촉진하기 위한 공개 모임, 기금 모금, 각종 캠페인이 포함된 대규모 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운동주의는 폭로, 이미지 메이킹 그리고 영리 목적의 신문과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우울하고 낙담한 이들의 관심 끌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리더들은 기업 매체에 소개됩니다. 또한 책을 출판하며, 유명한 정치인, 인기 가수, 왕족, 그리고 다른 유명 인사들과 만납니다.
운동주의의 가장 좋은 예는 2002년 이라크 전쟁에 실패한 반대파에서,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 성적 학대를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그리고 그레타 툰버그의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추진력 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됩니다. 페이스북에 수천 개의 게시물을 올려야 하고 많은 예산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언론에서 홍보된 이벤트들을 통해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무언가를 조직할 수 있는 보다 헌신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히려 분산 시키는데 종종 사용되는, 아주 쥐꼬리만한 결과를 낼 뿐입니다.
이 운동주의 활동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개 성실하지만 그들의 활동이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2002년 9월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와의 전쟁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는 대표적인 운동주의였습니다.
반전 시위는 확실히 인상적이었고,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합동 대규모 시위를 형성했습니다.부시 행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용감하게 나선 수백 명의 정부 관리들, 심지어 몇몇 정치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무적인 노력들 중 어느 것도 소수의 엘리트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한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는데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폭탄 테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그 갈등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했음에도 아주 적은 수의 부유한 기득권은 여전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그런 위험한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왜 그 모든 시위와 항거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유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거의 없었을까요?
우리는 미디어에서 주목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완전히 현혹되어 왔습니다. 운동주의의 핵심 가정은 만약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그것이 엘리트 기득권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자들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적으로 낯선, 그들만의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을 아무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언론은 명분이 충분한 관심(관심은 바로 미디어가 파는 상품입니다)을 얻어야 하며, (영리 목적의 미디어를 통해 지위가 만들어진)유명인사와 정치인들이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합니다. 운동주의의 요점은 참가자들에게 소셜 미디어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들의 행동이 가치 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소셜 미디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활성화를 촉진하여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패한 영리 언론에서 보고된 활동들은 그 기업들의 이익을 제재하는 활동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운동들이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지도자들이 그 기업들로부터 수익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미디어가 보여 준 영웅들의 방식으로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동주의는 공허한 소비 문화를 발전시키고 자아 숭배를 도모하기 위한 운동의 연장선입니다. 운동주의의 목표는 자기 실현이지 자기 대의에 대한 도덕적 헌신이 깊은 조직적 집단의 형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고의 역겨운 수프에 너무 오랫동안 흠뻑 빠져있으면서, 어떤 운동을 일으키려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지지하기 전에 대중 매체에 인식되어야 하며, 유명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고 저절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사용자’가 아니라 기업 고객에게 판매되고 있는 ‘제품’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상대하는 기업 고객들이 당신을 구매할 때 당신에게 무엇을 원할까요? 그들은 당신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되 실제 영향이나 결과는 없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운동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1850년대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이 경제의 변혁을 이끌었고 실제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시켰던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노예제도 반대 운동은 지역 단체들의 사람들, 정기적으로 만나 정책을 논의하고 급진적인 행동을 촉진하기 위해 모임을 갖던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대규모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노예해방운동 회원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남부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들을 반복적으로 감행하는 지하 철도와 같은 행동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농장내에서의 끔찍한 투쟁을 조직하는 일들을 포함했습니다.그러한 희생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조직들은 훨씬 더 강력해졌습니다.
노예제도 반대운동의 회원들은 평생 동안 지속된 참여 모임 그리고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서명하라는 청원서를 유포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해한 활동이 수익성 있는 노예제도라는 범죄를 끝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카드는 부유한 자선가들의 지원이 아니라 그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그들의 의지였습니다.
노예제도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당시 이렇게 썼습니다.
“이 투쟁은 도덕적인 것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도덕적이며 육체적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투쟁이어야 합니다. 권력은 요구 없이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습니다. 결코 내준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조용히 따를 어떤 것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에게 부과될 불의와 옳지 못함의 정확한 척도를 알아내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말이나 주먹, 또는 그 둘로 저항을 받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폭군의 한계는 그들이 억압하는 자의 인내력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미국 정치의 두번째 문제는 불평주의입니다. 불평주의는 습관입니다.
특히 저널리즘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과의 일상 대화에서 습관적으로 미국의 잘못된 점, 그리고 불공평한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이지만, 현 상황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이나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으면서 듣는 사람에게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제안하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에 대한, 그리고 정치적 논쟁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시민들을 좌절시킵니다. 우리는 재난을 겪게 되고, 깊은 절망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권력자들이 이 수그러들지 않는 불평주의에 아주 기뻐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안적 언론 매체 역시 행동할 기회를 보이지 않아 정치적 위기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대체 언론이 어쩌면 조금은 더 정확한 보도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당신이 이웃들과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집단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떠한 제안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마존, 페이스북, 비아콤,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독점 기업들에게서 독립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불평주의 저널리즘은 종종 도널드 트럼프, 조지 소로스, 제프베조스와 같은 소수의 ‘나쁜 사과’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개인들이 좀 더 자상하거나 또는 조금 더 계몽이 된다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시사합니다.
경제의 구조가 어떻게 탐욕과 착취를 부추기는지, 소수에 의한 금융이나 제조업, 무역의 통제가 어떻게 우리의 경제 현실을 결정하는지 등에 대한 분석은 없습니다.
전쟁을 벌이거나 화석 연료의 홍보, 또는 기업의 수익을 창출하고, 그 이윤이 그러한 운동주의를 조직하고 불평주의 저널리즘을 작성하는 중상류층 지식인들의 퇴직금 계좌나 주식 포트폴리오로 환원되는 등의 과정을 절대적으로 금지 시켜야 할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헌신된 효과적인 집단들을 조직하면, 우리는 경제와 정치 체제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접근 법은 불평주의 저널리즘에서 절대 언급되지 않습니다.
언론에서의 불평주의는 지난 30년간 지적 담론의 급진적 타락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리매체에서의 분석에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백악관이나 의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조직의 기관적 역사는 전혀 제시되지 않습니다. CIA나 구글은 내부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해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들이 마치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 똑같은 조직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결핍은 독자에게 단지 부정적인 정보만을 남겨두고 더 깊은 문제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지침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마법사주의, 또는 정치에서의 마법사들의 진급입니다.
언론에서 토론 뒤에 숨겨진 가정은 바로 우리가 특별한 사람을 뽑거나, 특별한 사람을 따라야 하며, 만일 그 한 사람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은 11월에 이 마법사에게 투표한 다음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이 마법사가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마법사주의 미사여구는 민주당이 돈을 낸 광고 회사들이 추진하는 ‘변화’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버락오바마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시민들은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대기업과 연계된 기업 자금을 사용하여, 다만 그들이 이 훌륭하고 또렷한 정치 인물을 지지한다면 오바마는 미국을 변화시키고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전 대통령의 대규모 범죄 이후 진정한 변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민주 당원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기관의 부패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참여시켰어야 했고 위험하지만 필수적인 집안 대청소를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바마에게 그것은 너무 쉬웠습니다. 우리가 했어야 했던 일은 단지 그에게 투표하고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할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냉정하고 침착한 ‘변화’의 요원 오바마는 서둘러 기업 은행들을 구제하고, 그의 진정한 지지자들, 즉 그의 언론 보도를 책임져 준 이들에 대한 보상으로 금융 규제를 없애는데 준비된 손을 빌려주었습니다.
버니 샌더스 캠페인 또한 시민들에게 어느 정도 호소력은 있었지만, 그 역시 비슷하게 우리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줄 마법사로 팔렸습니다. 그의 선거 캠페인은 예비 선거에서 값비싼 광고를 하기 위해 회사에, 돈을 지불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보낸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좋은 뜻으로 한 일이었겠지만, 샌더스의 캠페인은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자급자족하게 하고, 그들 자신의 개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인 조직을 지상에 건설하는 데 단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도 의존성을 키웁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다르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테다스 콕팔 교수의 저서『약화된 민주주의: 회원에서 미국 시민 생활의 관리로』는 미국인들이 어떻게 YMCA, 메이슨, 해외 참전 용사 또는 라이온스 클럽과 같이 민주적 행정을 실천해온 지역 단체들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경영의 정치적 문화가 적극적인 참여를 대신하면서 민주주의와 투명성에 치명적인 추락을 초래했습니다. 시민 참여의 상실은 오늘날의 불분명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한번이라도 민주당이나 공화당에게서 당신의 의견을 묻거나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사에 참석하도록 당신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까?
페이스북에 글을 쓰거나 도널드 트럼프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불평하는 것으로 미국 내 정치의 얄팍함을 물리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론 집합체들에게서 정치인을 위한 TV광고를 사들이는 것으로 건강한 정치 문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지역 수준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그리고 그 시민들과 매일 작용하는 강력한 기관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을 끄고 우리 이웃들의 문을 두드리며, 친구들과 진짜 이슈에 대해 논의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이 일을 해줄 수 없습니다.
일본의 철학자 오규 소라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체스 게임에서 명수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 방법은 체스의 모든 전략, 모든 opening과 endgame을 배우고, 모든 동작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통달은 가장 익숙합니다. 하지만 장인이 되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체스의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규칙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순간은 매우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정치적 위기는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이 제기하는 끔찍한 위험 또한 우리에게 완전한 변화를 위한 드문 기회를 제공합니다.
저는 “우리 스스로 저항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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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5
다른 백년
이만열 (더나은당 당대표 )
“촛불을 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청년 여러분!
우리(이 글은 저와 구예린 아시아인스터튜트 연구원이 함께 쓴 글입니다)는 손에 촛불과 직접 만든 포스터를 들고 광화문광장에 모인 여러분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학생도 있었고, 고등학생, 심지어 중학생도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법치와 책임정치를 요구하는 모습은 매우 숭고했습니다. 거기에는 정치의식의 맥박이 뛰고 있었습니다.
언론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칭찬했고, 이제 한국은 민주주의 모범국가가 됐다고 추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그의 절친 최순실이 철창에 갇혔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반동으로 끝난 시민혁명들
1960년 4월 26일에도 한국에서 어떤 대통령이 사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에 밀려 사임했을 때, 학생들은 환호했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세에 어두웠고, 앞으로 어떤 정부를 세우고, 어떤 정책을 추진할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승만 사임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틈타 누군가가 권력 찬탈을 노린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장면 정부는 분명한 비전이 없었고, 위험한 정치게임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박정희라는 영리한 젊은 장군이 군대 내 불만세력을 규합해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질식당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시민혁명의 열광이 잦아들 때쯤, 항상 반동이 찾아왔다. 이런 과오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왼쪽 사진부터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1979년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집권에 성공한 신군부의 전두환, 그리고 1987년 야권의 분열을 틈타 합법적으로 독재권력을 연장한 노태우.
혹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떠올려 보십시오. 3김의 정치적 분열은 결국 전두환 장군의 야만적 통치로 귀결됐습니다.
1987년에도 3김은 분열했고, 결국 노태우 장군이 집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잠시만 들여다보면, 시민들의 수많은 민주화 투쟁이 정치인의 분열, 그리고 정치적 기회주의자의 득세로 실패하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한국은 그후로 꾸준히 발전했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과거처럼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생각입니다. 박근혜를 몰아내는 것이 결코 최후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경유착 해체를 위한 첫걸음일 뿐입니다.
한국이 처한 상황
한국경제는 무역에 크게 의존하며, 식량과 에너지를 수입합니다. 올해에는 심각한 경기침체가 예상됩니다. 언론은 애써 감추고 있지만, 이미 해운업, 조선업, 그리고 철강업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근근히 버티는 산업에 국민의 혈세를 뿌려 겨우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그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은 사드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경제교류를 빠르게 줄이려는 중국, 그리고 관세 등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트럼프정부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부모세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완전자유무역체제는 붕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더군다나 트럼프정부는 한국에 보수정권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트럼프 주위에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는 매파가 가득합니다. 신임 국방장관 제임스 마티스는 중국을 미국의 직접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에 의한 죽음(Death by China)≫이라는 논쟁적인 책을 쓴 무역보좌관 피터 나바로는 미국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중국의 불공정무역 탓으로 돌립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면 사드계획도 철회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맞서 한국을 미일 동맹으로 묶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습니다.
사드는 드론, 헬리콥터 등 한국이 구매하는 미국 무기 세트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2014년 78억 달러의 미국 무기를 산 최대 고객이었습니다. 미국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한국에 대한 무기 구매 압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한국 청년들의 처지
한국의 학생들은 진정으로 자기 나라의 발전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잘못된 교육시스템이 그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고등학교와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사라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지루함을 참아가며 경영, 경제, 회계학 수업을 듣습니다.
지금처럼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문학을 홀대하고, 그에 대한 지원을 축소한다면, 결국 우리는 돈과 권력에 지배당할 것이다.
아무리 삼성그룹이 경영 전공자를 찾더라도, 만약 여러분이 좋은 정부와 건강한 사회를 갖고 싶다면, 정치철학, 역사,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인문학은 지금과 같은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떻게 권력을 견제하고, 책임있는 시민성을 만들며, 독재의 위험을 피할 수 있을지 알고 싶다면, 플라톤과 공자, 베버와 맑스를 읽으십시오. 또 그들을 읽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지금 듣고 있는 경영학 수업은 지금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부모세대들, 그러니까 1960년, 1979년, 1987년의 시민항쟁에 참여했던 그 세대들은 지금의 젊은세대보다 철학과 윤리학,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전략에 더 밝았습니다.
혹시 이번 촛불집회 이후에 함께 모여 정치개혁과 정부의 본질 등에 대해 토론해본 적이 있나요?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국민을 섬기는 정부를 만들지 밤늦도록 토론한 적 있나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또는 홉스의 ≪리바이던≫을 읽으면서 책에다 빼곡히 메모를 한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꼭 그렇게 하십시오. 다시 한 번 정치인에게 속지 않으려면 젊은이들이 정치와 정부, 공공정책의 원리를 제대로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촛불시민은 위대하다고 부추기는 언론의 감언이설을 조심하십시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 같은 언론도 상당히 상업화되면서 날카로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사는 심층 분석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더 몰두합니다. 그래야 수입이 생기니까요.
그러나 호기심만 자극할 뿐 세상이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대중매체와 전자 콘텐츠, 그리고 SNS는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감시할 기회를 줬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매체는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는 부패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들 매체는 24시간 내내 최순실 사태를 보도함으로써 정작 한국을 위태롭게 하는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외교적 도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합니다.
보수매체든, 진보매체든 의회를 통과한 법안, 정부지원금을 받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습니다. 언론이 정책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니, 우리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이들이 갈취한 금액은 이명박정부에서 4대강사업에 쏟아부은 21조 원 또는 자원외교에 낭비된 수 십조원에 비하면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멀쩡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명박의 경우 정부 관련 기관을 중간에 끼고 정책결정을 했기 때문에 대통령 개인의 비리가 감춰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새누리를 보수정당, 민주당과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착각합니다만, 정치인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후변화, 또 다른 위협
혹시 촛불집회를 할 때, 바깥 공기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눈치챘나요?
박근혜정부는 대기 관련 규제를 없애고, 공장 감독관을 축소했습니다. 그 공장들은 앞으로 20년 동안 암과 수많은 질병을 야기할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헌법 10조에 규정된 ‘행복추구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이 글의 저자인 페스트라이쉬 교수와 김기도 작가가 함께 디자인 한 것입니다.
한국의 스모그가 매일 중국에서 건너온 오염물질과 결합됩니다. 지금은 중국의 오염이 한국보다 심하지만, 중국은 향후 10년 동안 태양광과 풍력 발전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OECD국가 중 재생에너지 사용비율이 가장 낮고, 오히려 화석연료 사용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